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아카시아는 잠들기 전 설명 받은 데로 1층 식당을 향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홀로자기에 넓은 침대 4명이 함께 누워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로 큰 침대였다. 잠옷으로 입은 흰색 원피스 말고는 갈아입기에 어려워 보이는 드레스들뿐이라 간단하게 숄을 어깨에 걸친 뒤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마리와 아카시아의 방은 3층에 디트의 방과 다과실과 서재는 2층에 있고 1층엔 식당과 시온의 방이 있지만 아직 어린 아카시아의 몸으로 3층의 방을 이용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디트와 마리로 인해 1층 빈 방을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다. 임시라고 하지만 온갖 인형과 장식들로 꾸며진 방은 3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당엔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 디트와 잠이 덜 깼는지 연신 하품을 하는 시온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디트의 손짓에 아카시아는 쪼르르 달려가 그 옆에 앉았고 아카시아가 앉은 것을 확인한 캣트시들이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아침은 여러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와 샐러드가 나왔다. 어제 저녁에 먹은 옥수수 고기 스프와 빵도 맛있었지만 아침으로 나온 파스타 역시 입맛에 맞고 맛있었다. 식사를 다 끝마치고 느긋이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고 있자 마리가 식당에 등장하였다. 늦게 잠들었는지 아직도 잠이 가득한 얼굴로 식당에 들어오던 마리는 아카시아를 발견하곤 달려가 볼을 부비며 격하게 아침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시아야~ 잘 잤어? 무서운 꿈이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고? 나랑 같이 자도 괜찮은데 오늘은 같이 잘까?”
“정말 편하게 잤어요. 캣트시들이 계속 옆을 지켜줘서 무섭지도 않았어요.”
“마리야 우린 2층에 올라가 있을 테니 식사를 마치면 올라와.”
“에?! 시아는 놔두고 가! 같이 이야기 하면서 먹고 싶단 말이야!”
“늦게 온 네 잘못이야. 시아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급하게 먹는다고 체하지 말고 느긋이 먹고 올라와.”
디트와 마리의 끝나지 않을 듯 한 공방전은 디트의 승리로 아카시아를 번쩍 안아들고 2층으로 향하였다. 그 뒤를 시온이 묵묵히 따라 올라갔다.
“어제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우리 소개도 못하고 끝냈네. 우선 내 이름은 디크리트. 디트라고 편하게 부르면 돼. 현제 리더? 가장 역할을 맡고 있지. 여기서 말을 타고 한나절만 달리면 나오는 솔렌왕성에서 기사단장을 하고 있어.”
“세이시온. 시온이라고 불러. 나도 솔렌왕성에서 일하지만 대부분 저택에서만 지내고 있으니까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면 돼. 아, 지하실은 위험하니까 내려오지 마.”
“지금 1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마리시엔. 마리라고 부르면 좋아 할 거야. 마리는 아직 안정기가 지나지 않아서 저택에서 지내고 있지만 곧 유희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유희를 떠날 수 있어도 네가 저택에 있다면 나가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디트와 시온은 자신들의 이름과 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천천히 아카시아에게 알려주었고 애칭으로 쓸 시아라는 이름과 유희를 떠날 때 쓰는 ‘실베스테르’라는 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귀족들과 인사할 땐 이렇게 드레스 끝을 잡고 ‘아카시아 실베스테르’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요?”
“맞아. 우리가 폴리모프한 모습은 인간과 닮아있지만 눈만은 드래곤의 눈 그대로야. 이런 식으로 어두운 곳에서는 희미하게 빛나는 게 특징이야.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우릴 일반인들은 ‘미르’라고 부르고 있어.”
디트가 설명을 하면서 커튼으로 빛을 차단하자 어두워진 방 안에 밝은 눈동자들만이 보였다. 어두운 밤이면 볼 수 있는 짐승의 눈과 닮은 안광은 낯설면서도 신비로운 보석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쓰는 가문명은 과거 1대와 2대 드래곤들이 쓰던 성들 중 하나야. 미르는 인간들이 정한 법이나 가문에 구속되지 않지만 우리가 가문 명을 쓰는 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야. 간혹 가문이 없다고 무시하는 인간들이 있어서 트러블을 일으킬 때도 있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아래로 보는 귀족들이 꽤 있는 편이거든. 미르라는 종족은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어려도 다들 신경 쓰지 않는 편이야. 미르는 강한 마력과 체력을 가진 지혜의 종족. 현자의 종족이라고 불리기도 해.”
이런 저런 설명을 끝마친 디트는 바쁘게 제복으로 갈아입고 수도로 향했다. 얼마 전 퇴치한 몬스터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부관이 모든 일을 끝내놨을 테지만 자신이 직접 가서 보고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수도로 떠났고 시온은 시작한 연구를 끝내기 위해 지하실로 도시락과 간식을 잔뜩 챙겨서 떠났다. 그렇게 다과실에 남은 인물은 마리와 시아 둘 뿐이었다.
“그럼 우린 소화나 시킬 겸 산책을 하고 올까?”
마리의 손을 붙잡고 저택 밖을 나선 시아는 아직은 약간 쌀쌀한 봄날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와 닮은 듯 다른 세계.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할 세계를 그 눈에 모두 새기려는 듯이 시아는 마리와 함께 이 세계에서의 삶을 공부하였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이윽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었다.
---------- 아카시아 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