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영웅들은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하여 태어났고 사라져 갔다. 여기 4명의 영웅이 자신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지키기 위하여 새로이 태어났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모든 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의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고통스러우면서 행복한 평범하지만 웅장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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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겠습니다.”
텅 빈 집을 향해 언제나의 인사를 건네고 언제나의 통학 길을 지나면 언제나의 괴롭힘이 있는 학교가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듯 한 톱니바퀴 같은 삶이 소녀를 옥제여 오기 시작한다. 밝은 달빛이 소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려 어둠속으로 끌어들이는 듯 한 어두운 밤. 학원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밝은 학원 건물에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어둠 속 소녀의 눈앞에는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가해자 소녀가 깜빡이는 푸른 신호등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고 가해자 소녀가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빠르게 지나쳐가서인지 소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깜빡이던 신호등은 가해자 소녀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가해자 소녀는 짜증 섞인 말투로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한다. 그런 가해자 소녀의 등 뒤로 다가선 소녀는 빠르게 달리는 차들을 향해 가해자 소녀를 밀어버리려는 듯 긴장한 얼굴로 서있었고 이윽고 각오를 다진 듯 주머니 속에서 양 손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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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5월의 태양 빛이 소녀를 비추고 있다. 5월이면 언제나 집 앞 공터를 향기로 가득 채우던 아카시아가 소녀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왕따로 인해 학교생활을 힘들어 하고 우울해하는 소녀를 위하여 가족들이 나들이를 준비하였다. 소녀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힘들어하는 소녀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어린 동생이 나들이를 제안하였고 부모 모두 찬성하여 나들이를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학교의 수업이 일찍 끝나고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나선다. 시원한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가족을 기다리며 소녀는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건다. 이윽고 연결된 전화. 행복한 미소를 짓던 소녀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온 소식을 믿지 못하는 듯 행복에 찼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둡게 변하였고 두 다리의 힘이 빠지는지 소녀는 그 자리에 풀_썩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가족 되시는 분입니까? 여기 교통사고가 났는데 안타깝지만 생존자는 없는 듯합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기계와 같이 교복을 갈아입고 학교를 향해 걸어간다. 무수히 반복되어온 생활. 소녀의 몸은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교실의 문고리를 잡으려 뻗었고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문 너머로 들린 아이들의 소리.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사고 날 뻔했잖아!”
“그 사고 난 차가 반장네 아빠 차라며?”
“짜증나! 그 차 때문에 오빠들 공연 못 볼 뻔 했잖아!”
“그러게 누가 차도로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가래? 네가 갑자기 튀어나가는 바람에 너 피하려다가 사고 난거잖아.”
“내가 사고 냈니? 그 차가 갑자기 튀어나온 거고 피해자는 나야!”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밝혀진 진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문고리를 잡으려 뻗었던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고 꽉 진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는지 하얗게 변해있었다. 소녀는 그런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뒤로 돌아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복도를 지나 학교를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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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찰나와 같은 시간이 흐르고 붉게 변했던 신호등은 어느새 푸른색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건너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가해자 소녀를 바라보며 버스 승강장 유리에 비쳤던 자신의 웃는 얼굴이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고 소녀는 생각한다.
[빠-앙]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어두운 도로 위를 뒤 덮었고 멀리 어둠속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인다. 순간적인 사고(思考)로 소녀는 가해자 소녀가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예견하였다. 분명 저 붉은 불빛과 충돌하여 가해자 소녀는 어두운 도로 저편으로 날아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높이 날아오른 것은 소녀였고 가해자였던 소녀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현장을 빠져나간다.
‘아, 죽어버렸으면 좋았을걸...하지만 살아서 다행이야. 내 눈앞에서 그녀가 죽어버린다면 난 진짜 살인자가 되어버리겠지’
도와주지 않아도 아무도 소녀를 향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한 순간이나마 가해자 소녀의 죽음을 바랬었고 소녀의 목숨을 저울질했음이 틀림이 없기에 자신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는 맑은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은 보름인가? 달이 너무 크고 밝아서 예쁘네? 이건 아카시아 향인가? 이런 곳에도 피어있었나?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상처가 크게 남으려나? 아니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이대로 죽는 것도 괜찮을지도 몰라. 이제 아무도 없는 그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소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붉게 물들어 땅으로 떨어졌고 생명이 꺼져가는 소녀의 눈앞에 따뜻한 빛을 내는 커다란 털 뭉치가 나타났다. 만지면 폭신할 것 같은 그 모습에 소녀는 손을 뻗어보려 하지만 이미 망가진 몸은 소녀의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아아, 만지고 싶게 생겼는데 만질 수 없는 것도 고통스럽네.’
[그대의 몸이 자유로이 움직여도 나를 만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새로이 삶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소멸 할 것인가?]
털 뭉치로 보이는 생물에게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고 소녀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보세요. 아마 모두 새로운 삶을 선택할 걸요?’
방금 전까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삶이라는 희망을 제시하는 털 뭉치에게 소멸이 아닌 삶을 요구한다. 아무리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도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살고 싶어’라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바라던 소녀 역시 한 줄기의 작은 삶에 대한 집착이 ‘삶’을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털 뭉치에게 얼굴로 보이는 부분은 없었으나 분명 미소를 지었다고 느껴졌다. 온화한 그 미소를 느끼며 소녀는 짧지만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고 털 뭉치는 그런 소녀의 몸에서 푸른색 불꽃을 꺼내어 달빛 속으로 사라진다.
소녀가 죽은 뒤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단 하나의 작은 변화라고 한다면 소녀가 죽은 도로 옆에는 수많은 종류의 꽃과 편지가 쌓여 있었고 소녀는 사람들에게 작은 영웅으로써 가슴 속에 새겨졌다는 사실이다.